남들보다 서둘러 휴가를 가고자 했던 건, 사람도 차도 바글바글한 섬이 싫어서 그랬어요.
거기다 평소보다 너무 말도 안되게 비싸지고, 원하는 곳은 경쟁도 해야 하고, 쉬러가는데 그렇게까지 머리 쓰는 게 싫었거든요.
한겨울이나 좀 어정쩡한 계절에 휴가를 주면 좋을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요?
열흘씩, 혹은 고무줄처럼 휴가를 적당히 플렉시블하게 쓰던 예전 직장과 달리 지금의 직장은 서로서로 스케줄을 피해,
바쁜 일정도 피해, 딱 일주일. 그렇게 다녀와야만 합니다.
올해는 건너뛰고 내년엔 런던을 가야지 하는 마음에 선택한 제주도.
결혼 전에 다녀온 제주도와 다른 곳을 정해서 가려니 선행학습이 필요한 것 같아 네이버에서 실제 제주도가 좋아 그곳에서
살게 된 젊은 부부의 블로그와 카페를 보고서는 좋은 곳을 많이 알게됬습니다.
늘 여행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막상 떠나서 설레고 즐거운 것보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더 즐거운 것 같습니다.
북적거리는 거 딱 싫어하는 두 사람이 만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작년 큐슈여행 이후로 두번째군요.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우제씨는 만족스런 렌트카를, 나는 고 김영갑선생님이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용눈이 오름을 오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아침 열시쯤 공항에 도착해서 KT렌트카에서 렌트할 차를 인도 받은 후 바로 서쪽 해안을 따라 죽~달렸습니다.
열심히 제주도의 곳곳을 알아보고 있을 때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왠지 이끌렸던 곳이 바로 월정리의 아일랜드 조르바 라는 해변가의
작은 카페랍니다.
이곳에서는 모카 포트로 커피를 우려내어서 만들어 줍니다.
공항에서 월정리까지 오는데 보슬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 에메랄드빛 월정 바다를 보지는 못하겠구나'생각했죠.
근데, 조르바의 펄럭이는 저 깃발이 월정 바다 색깔이여서 조금 서운한 기분이 달래지더군요.

누군가가 가게 앞에 차를 세워놓는 바람에 원하는 사진을 못찍고 계속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비는 내리네요.

우제씨와 기념 사진도 찍고.

조르바의 새 식구 같아요.
새끼 고양이가 한마리 또아리 틀고 있네요.

제주도 내려오기전에 머리털 나고 첨으로 손톱에 색칠도 해봤습니다.
물론 자주 부엌에서 요리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리하는 아낙은 메니큐어는 금물이란 생각에 아직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사진!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아까는 sm5가 센스없이 막고 있었는데. 차 뺄때까지 기다린 다음 잽싸게 찍었습니다.
이렇게 바다를 바라보면 누구나 다 시인이 되려나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비가 보슬보슬 내려 그런지 바다 빛깔이 아직은 청록색입니다. 기대 이상이에요.
우의를 꺼내어 미리 챙겨 입은 다음 바로 용눈이오름으로 향했습니다.

미친 척하고 타고싶었던 자동차 타보기를 했는데, 어쩌다보니 BMW328을 타게 되었네요.
뚜껑 열리는 차 타보고 싶었어요. 근데 마침 거짓말같이 용눈이오름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네요.
후덥지근 하지도 않고 시원한 날씨에 바람도 불어주고.
정말 오름 오르기 좋은 날씨입니다.

오름을 오르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내 다리를 배려하는 듯한 적당한 경사와 화산 자갈의 바스락거림.
걷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곳에서는 생각 버리기 연습이 너무나 잘 됩니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지 않기 훈련을 하다보면
뇌도 쉴 수가 있어서 정신건강에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오름을 오르는 건,
내 몸에 진정한 휴식을 주는 것입니다.



생전의 김영갑 선생이 왜 이렇게 이 오름을 사랑하셨는지 알것 같습니다.
목이 메이게 아름답고 마음에 담고 싶다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로군요.
모든걸 다 감싸안아주는 포근한 능선입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 이외엔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아요.
어쩌다 비치는 사람 모습이 이렇게 오름과 잘 어울립니다.
성수기에 떼로 올라오는 사람들 틈에서 오름을 느꼈다면 아마 이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겁니다.


용눈이오름을 내려오자 마자, 우리 말고
두 세팀의 커플들이 더 도착해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마자 비가 확 쏟아지네요.
변화무쌍한 제주도 날씨.
이제 서귀포로 향하는 길에 이 가슴벅참을 안고 김영갑 갤러리의 특별전 "용눈이오름"을 보러 갑니다.

김영갑 갤러리의 좋은 점은 무인 카페도 있지만, 입장권 대신 사진 엽서를 준다는 것이지요.
매번 다른 사진 엽서를 모으는데 이걸 받으면 굉장히 뿌듯합니다.
올레길을 걷는 건 아니지만 기념으로 도장도 하나 팍! 찍었습니다.
시원한 제주 감귤 주스를 마시고 다시 한번 눈감고 용눈이 오름을 가슴속에 새겨봅니다.
숙소인 씨에스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잠시 들린 서귀포의 이중섭 거리.
국수 하나 말아먹고, 거리를 구경하고,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은 휴관이더라고요. 이중섭 미술관.
첫 날 숙소는 씨에스 호텔에서 운영하는 한옥 게스트하우스 "카노푸스"입니다.
우리는 독채인 "해당"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처음엔 좋아라 했는데, 나중에 성읍민속마을에서 지내신 분들의 후기를 보니 그곳의 전통가윽도 아늑하더라고요.
괜히 비싼돈 주고 호텔로 갔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볼때, 그냥 그런 펜션도 아니고, 천정도 높고 널찍하니, 조용해서 잘 지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늦저녁에 회 한사발 먹고 돌아가는 길에, 이녀석이 다쳐서 피를 흘리고 못날고 퍼덕거리는 걸 발견했습니다.
119에 신고하고, 한참 기다리니 조류구조협회에서 어떤 분이 나오셔서 데려가셨습니다.
나중에 조류도감을 뒤져보니, 이 녀석은 노랑부리백로 새끼더군요. 나름 천연기념물 격 새인데,
목숨을 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백로야~ 이담에 강남오면 행운의 박씨 물어다다오~~
이렇게 제주도의 첫날밤이 저물어 갑니다..